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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이라 쓰며 중립을 놓친 언론 – 종교 용어, 언론 보도에서 괜찮은가?

21일(현지시간) 바티칸 산타 마르타의 집 1층 경당에서 이뤄진 프란치스코 교황의 입관식에서 피에트로 파롤린 교황청 국무원장(왼쪽)이 입관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기도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30475

 

 

 

지난 며칠 사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서거 소식이 전 세계에 전해졌습니다. 한국 언론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다수의 주요 매체들이 일제히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그의 죽음을 보도했습니다. ‘선종’이라는 단어는 익숙하면서도 경건하게 들리지만, 이 표현이 과연 공적인 언론 보도에서 적절한 것인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선종’이란 무엇인가?

‘선종(善終)’은 단순히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는 의미로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은 가톨릭 교리에서 비롯된 종교적 개념입니다. 가톨릭에서 선종이란, 죽기 전에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받고, 큰 죄를 용서받은 상태에서 하느님 곁으로 간 것을 의미합니다. 즉, 교회가 인정하는 신앙적 준비가 모두 끝났다는 전제가 깔린 표현입니다.

 

왜 문제인가?

문제는 이러한 종교 내부의 용어가 아무 설명 없이 일반 언론 기사에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선종'이라는 표현은 종교적인 판단을 담고 있으며, 이를 그대로 보도하면 언론이 가톨릭의 교리적 해석을 사실처럼 받아들이는 셈이 됩니다. 결과적으로 언론은 중립성을 잃고 특정 종교의 입장을 대변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단어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언론은 공공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기관입니다. 종교적 권위를 뒷받침하는 표현을 아무 비판 없이 차용하는 것은, 특정 종교에 특권을 부여하고, 독자 모두가 그 믿음을 공유한다는 전제를 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다른 표현은 없었을까?

물론, 교황은 전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존엄하게 표현하고 싶었던 언론의 의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거', '별세', '타계'와 같이 중립적이면서도 품위 있는 표현은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굳이 “하느님 곁으로 갔다”는 종교적 해석을 동반하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애도의 뜻을 전할 수 있습니다.

 

언론의 중립성은 어디로?

이번 사례는 언론이 외형적으로는 객관성과 공정성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강력한 종교 권위 앞에 무비판적으로 무릎 꿇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특히 종교처럼 다양한 관점을 지닌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는 더욱 언어 선택에 신중해야 합니다.

종교를 존중하는 것과, 공공 언어에 종교적 확신을 가져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대한민국은 세속 국가이며, 언론은 종교의 홍보 기관이 아닙니다. ‘선종’이라는 표현 하나에 담긴 교회 권위와 신앙적 해석을 여과 없이 받아쓰는 것은, 언론의 기본적인 책무를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죽음 앞에 모두는 평등하다

교황 역시 결국 한 인간으로서 삶을 마감한 것입니다. 언론이 해야 할 일은 그 사실을 담담하게, 그리고 세속적인 언어로 전하는 것입니다. 누가 죽었든, 언론은 중립성과 사실 보도의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그게 바로 독자에 대한 예의이며, 언론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